지명에 대한 유래
덕유산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의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연유에는 다음의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구씨와 천씨가 많이 살았다 하는데(한글학회 지명총람), 암행어사 박문수의 설화에 의하면, 이 곳에 구씨와 천씨의 성을 가진 집안이 집단으로 거주하여 두 성씨를 따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둘째는 기이한 바위가 9000개나 있다 하였고(한글학회 지명총람), 셋째는 예전에 절이 많이 있어서 수도승이 9000명이나 머물렀다 하여(한글학회 지명총람) 붙여졌다고도 한다. 갈천 임훈의 「등덕유산 향적봉기」에는 구천동에는 불공을 이룬 자 9000명이 머문 둔소(屯所)라는 뜻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구천동’에서의 ‘구’는 아홉과는 별 관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말에서 ‘구(九)’는 단순히 아홉의 뜻만이 아니라 구우일모(九牛一毛), 구서(九暑), 구척장신(九尺長身) 등과 같이‘크다’나‘길다’의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주구천동은 엄청나게 긴 골짜기다. 이 길고 아기자기한 골짜기를 우리 조상들은 단순히 ‘심곡(深谷)’이니 ‘장동(長洞)’이니 하는 말로의 표현이 별로 마땅하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길고 굽음’의 뜻으로 많이 써온 ‘구(九)’자를 취했을 것이고, 이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 천(千)이라는 숫자까지 보태어 ‘구천(九千)’이란 말을 생각했을 것이다.
4) 이름에 전래되는 설화
◉ 딸이 그리워 논 가운데 얼어붙은 허수아비
고구려 무학현 돌 마을에 을지씨 부부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큰 아들의 이름은 문상(文常)이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문덕(文德)이라 지었다. 모두 외할아버지인 귀곡선사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 중에 문덕은 뛰어난 지혜로 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바로 을지문덕 장군이다. 을지문덕의 형인 문상은 문사(文士)로서 일하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으로 상(常)이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고루 갖추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문상은 나면서부터 병약했고 병치레가 잦았다고 전한다. 문상이 열 살 남짓해서의 일이다. 하루는 경당에서 공부를 하고 오는 길에 고갯마루 쪽에서 소녀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곳은 돌 마을로 들어가는 고갯길이었는데, 그 고갯길엔 비룡지라 불리우는 못이 하나 있었다. 비룡지는 사방 30척이 되는 큰 연못으로, 고개를 넘나드는 길손들이 피곤하면 쉬었다 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소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문상은 한달음에 고갯길을 달려 도착해 보니 못 속에는 육순이 되어 보이는 촌로가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그 못가에는 열 살 남짓한 계집아이가 노인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울고 있었다. 문상은 급히 물 속으로 뛰어들어 촌로를 밖으로 밀어내었습니다. 노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듯 연신 허공을 향해 손바닥을 펴 잡으려 했고, 그 때마다 문상은 물에 빠지기를 몇 번이고 거듭하였다. 겨우 노인을 못가로 끌어내자 소녀가 노인의 손을 잡아 위로 끌어 당겼다.
노인은 자신을 구해준 문상에게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ꡒ나는 허씨 성을 쓰는 보잘것없는 위인이고 딸아이는 수라고 한다네.ꡓ 문상은 허수라고 부르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록 허름한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몸에는 청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문상은 마땅히 갈 곳도 없는 부녀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문상의 부모인 을지 부부는 문상과 함께 온 부녀를 보고 깜짝 놀랐으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아래채에 묶도록 하였다. 본래 복술가였던 노인은 그 뒤로 문상의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아 점사를 풀어주며 지냈다. 허수 역시 문상의 집안일을 돕기도 하고 문상, 문덕 형제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게 되었다. 허수는 문상이 경당에서 돌아올 시간이면 어김없이 고갯마루에 마중을 나가는 것이 하루 일과 중 빼놓을 수 없는 기쁜 일이 되어졌다. 하루는 문상과 허수가 비룡지 못가에서 놀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나 흠뻑 젖은 채 겨우 여우 굴에 몸을 피했지만 폭우로 변하자 두 사람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날 저녁 문상을 찾아 나선 을지 부부의 고함 소리에 허수가 여우 굴에서 나와 부부를 애타게 불렀다. 이윽고 집에 돌아온 문상은 날이 새도록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처럼 허수를 찾았다.
ꡒ허수야 우리 나중에 크면 혼인하자.ꡓ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허수는 하루 빨리 문상이 회복되기를 빌었지만 하루하루를 미음만 먹으면서 이어가던 문상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을 안고 허수는 문상이 죽던 날 새벽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아침에 집을 나가 비룡지에 몸을 날려 죽고 말았다. 허수가 죽었다는 소리에 허수의 아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날마다 온 들판을 헤매고 다니며 허수의 이름을 불렀단다. 누런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논에는 극성스럽게 새 떼들이 모였다가도 허수를 부르는 허수아비의 소리를 들으면 새들이 창공으로 달아나게 되었다. 허수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허수아비도 논 한 가운데서 죽고 말았다. 워낙 오랫동안 곡기를 끊은데다 기력마저 떨어져 지팡이를 짚은 채 죽고 말았다. 그래서 돌 마을에는 앙상한 허수아비의 형상만 보여도 새떼들은 날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곡식이 영그는 가을이 되면 들판에 허수아비를 세우는 것도 허수아비의 몸에서 나오는 찬 기운 때문에 새떼들이 날아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강영수의 소설 을지문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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