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 2 강 : 한국의 대표적 성씨
작성자 미래학회 등록일 2007-05-21 10:39 조회 1606


2) 한국의 대표적 성씨 유래
아주 오래 전 원시 부족사회에 여섯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와 각각 여섯 마을의 촌장이자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신라가 성립하여, 신라의 제도는 3성6부(三姓六部)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신라본기에 따르면 6부는 처음에 알천양산(閼川楊山), 돌산고허(突山高墟), 무산대수(茂山大樹), 자산진지(觜山珍支), 금산가리(金山加利), 명활산고야(明活山高耶) 여섯 마을이 있었는데 신라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를 주었다고 한다.
곧 알찬양산은 양부(梁部)라 하여 성을 이(李)로 하였으며, 돌산고허는 사량부(沙粱部)라 칭하고 성을 최(崔)로 하였으며, 무산대수는 점량부(漸梁部)라 하고 성씨는 손(孫)으로 하였으며, 금산가리는 한지부(漢祗部)라 하고 성을 배(裵)라 하였으며, 명활산고야는 습비부(習比部)라 하여 성을 설(薛)로 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다분히 성격상 전설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각 성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구체적이긴 하나 여전히 설화적인 측면도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이씨

이씨는 그 본이 400여개나 되지만 경주 이씨만이 정통의 대종임을 주장하며 알천양산의 촌장 표암공(飄岩公) 갈평(渴平)을 시조로 삼고 있다. 반면 전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公) 벼슬을 한 이한(李翰)이며, 청해(靑海) 이씨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이지란의 후예이다. 또 고성 이씨와 연안 이씨는 각각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서 귀화한 성씨이다.

최씨

ꡐ최씨가 앉은 자리는 풀도 나지 않는다.ꡑ라는 말이 있고 또 고집이 센 사람을 최고집이라는 말이 있는데 최씨의 역사도 오랜 성씨 중의 하나이다. 본관은 약 300여 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시조가 분명한 것은 40여 본 정도이고 최초의 시조는 신라 6촌 가운데 하나인 돌산고허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시조는 신라 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이며, 현재는 거의 모든 최씨가 최치원을 1세로 하는 경주 최씨를 본으로 삼고 있다.

손씨

신라본기에 따르면 손씨의 원조는 무산대수의 촌장 구례마(俱禮馬)라고 한다. 조선씨족통보에서는 모든 손씨는 본관은 각기 다르더라도 그 근원은 한가지로 모두 경주에서 나왔으며 신라 모량리 사람인 손순(孫順)을 시조로 삼고 있다고 전한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손씨의 시조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순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아내와 함께 품을 팔아서 늙은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런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늘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이를 민망히 여기던 그는 어느 날 아내에게 말했다. ꡒ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지 못하지 않소? 아이가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소? 차라리 이 아이를 땅 속에 묻어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드리는 것이 좋겠소.ꡓ 이에 그들 부부는 아이를 업고 모량리 서북쪽 취향산 기슭에 가서 아들을 묻으려고 땅을 파는데 홀연히 기이한 석종이 나왔다. 그들 부부는 이를 이상히 여겨 잠시 나무 위에 걸어놓고 그 종을 두드려보니 그 소리가 은은하여 들을 만 하였다. 그러자 아내가 옆에서 남편에게 말했다. ꡒ이 이상한 물건을 얻음은 분명히 아이의 복인 듯싶으니 아이를 묻지 않는 것이 좋겠다.ꡓ 이에 남편도 그렇게 생각하여 아이를 도로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들보에 매달고 두들겼더니, 이 은은한 소리가 대궐까지 들리게 되었다. 흥덕왕은 그 소리가 하도 은은해서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알아보도록 시켰다. 곧 신하는 흥덕왕에게 그 소리의 진원지를 전했다. 사실을 알게 된 흥덕왕은 크게 감동하여 ꡒ한나라 곽거는 아들을 파묻을 때에 하늘이 금 솥을 내렸다.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할 때 석종이 솟아났으니 이 두 효도는 천지에 똑같은 본보기로다.ꡓ 왕은 그에게 집을 지어주고 해마다 곡식 50석을 주어 그의 효성을 높이 받들게 하였다. 이에 손순은 전에 살던 집을 내놓아 절을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안치했다고 한다. 모든 손씨가 경주를 대종으로 하여 손순을 시조로 삼고 있으나, 안동 손씨만은 그 계보가 다르다. 시조는 순응(荀凝)으로 원래 순씨였는데 당시 고려 8대 왕인 현종의 이름이 순(荀)으로 같기 때문에 이를 피해서 손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배씨

신라 6부 중에서 금산가리 한지부가 유리왕에게 성씨를 배(裵)로 하사받았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배씨는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을 시조로 삼고 있다. 배현경은 원래 태봉국의 궁예 기병장이었지만 궁예의 횡포가 심해지자 신숭겸 복지겸 등과 함께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 개국공신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배현경의 원래 이름이 백옥(白玉)이었는데, 태조로부터 나중에 배씨 성을 하사받은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임금이 하사한 성씨는 그 당시 매우 귀한 것으로 여기었다.

설씨

설씨는 유래가 깊은 성씨이나 지금은 희귀한 성씨이다. 시조는 명활산고야 촌장으로 전하는 호진공(虎珍公)이며, 유리왕 때 다른 촌장들과 함께 설씨로 성을 하사 받았다. 역사에 나타난 설씨의 최초 인물은 신라 진평왕, 신문왕 때의 유명한 승려 원효대사이다. 원효는 문무왕 때 당나라 유학을 떠났다가 한밤중에 옛 무덤가에서 해골 물을 마시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승려이다. 신라에 돌아와 불교의 보급과 저술에 힘써 우리나라 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바로 이 설총이 경주 설씨의 시조이다.

서씨

서씨의 기원은 단군시대 예국(穢國)의 군장(君長)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아홉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 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 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 하여 중인변(衆人邊)을 부쳐 여(余)자를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위지 동사강목(魏志 東史綱目)의 기록에 따르면, 기자(箕子)의 40세 손이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 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이천서씨라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기자(箕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다른 성씨들도 많이 기인한다. 서씨로서 이름을 떨친 이는 신라 때의 개국공신 아성(阿城) 대장군(大將軍) 서두라(徐豆羅)를 비롯하여 유명한 서희 장군 조선대의 유학자 서경덕, 근세의 서재필 박사 등을 들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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